[아인여림][중기걸오] 몽리(夢裏) 06
“ 하, 웃기고 있네.. 맞는게 하나도 없네..”
갑작스레 들려온 재신의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재신에게로 향한다. 손에 쥐고 있던 대본을 탁자 위로 던져 놓은 재신이 자리에 벌러덩 누워 버리자 슬쩍 재신을 내려다 보던 민영이 작은 한숨을 내쉰다.
“ 뭐가 맞는게 없다는 거에요?.”
“ 이거 말이지.. 대물이 이런 녀석이었는 줄 알아?.. 내가 대물을 처음 봤을 때, 그 녀석이 자기 돈주머니를 든 녀석을 어떻게 했는 줄 알아?.”
“ 어떻게 했는.. 데요?.”
“ 우와악!!!.. 재, 재, 재, 재신씨!!!.”
얼결에 다리 사이를 쥐어잡힌 유천이 허벅지를 벌떡인다. 대본에 고개를 처박고 있던 중기까지도 고개를 처들고 재신을 향해 시선을 고정한다.
잔뜩 붉어진 얼굴로 당황한 유천의 손이 뻗어져 재신의 손목을 잡아 채기 전에 입술을 연 재신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이야기를 시작한다.
“ .. 내가 처음 만났을 때, 대물은 제 돈주머니를 빼앗은 남자 아랫도리를 이렇게 쥐어잡고 협박하고 있었지.. 그 처절한 왈패놈 비명소리가 어찌나 안쓰러웠던지..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고..”
“ 에?.”
“ 참.. 이상하지?.. 얼굴도 똑같고.. 너희가 한다는 이 요상한 사당놀음에.. 왜 이리 다 다르냔 말이지.. 그런데.. 저 구용하 낯짝 닮은 놈이 구용하 목소리를 들었다..”
일순 정적이 파고든다. 딱딱하게 굳어버린 중기도, 재신의 손에 아랫도리를 쥐어잡힌 유천도, 눈망울을 깜빡이며 미묘한 미소를 짓고 있는 민영도 쉽사리 단어를 끄집어 내지 못하고 있었다.
몇 일 전의 일을 모르는 척 함구하고 있었건만, 그것을 끌어올린 것은 재신, 그 자신이었다. 얼굴을 잔뜩 굳히고 재신의 얼굴을 노려보는 중기의 시선이 서늘하다. 딱딱하게 굳어버린 분위기를 쇄신한 것은 앓는 소리를 내는 유천이었다.
“ 아, 아야야, 아야야.. 재신씨.. 거.. 남의 아들내미 좀 놔줘요!..” “
“ 아.. 미안.. 미안..”
피식 미소를 지어 보이며 천천히 뒤로 물러나는 재신을 슬쩍 노려본 유천이 무릎을 세우고 앉아 다리 사이를 감춘다. 뭐가 그리 웃긴지 키득거리며 웃는 민영을 향해 서늘한 시선을 보낸 중기가 방금 전 재신이 집어 던진 아인의 대본을 집어 들어 재신의 무릎에 던져 버린다.
조금은 기분 나쁜 듯 얼굴을 찡그린 재신을 가만히 바라보던 중기의 입술 사이로 한숨이 새어 나온다.
“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집중해, 다른 사람들이랑 안하고 따로 한다고 억지를 피웠으면 다른소리 안나오게 해야되.”
“ 알아 알아.. 다 갑이 대본 연습 하다가는 걸릴 것 같아서 우리끼리 하겠다고 우긴거 알아요..”
유천이 사람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잘 나간다고 연예인 병에 걸렸다는 둥, 벌써부터 싸가지가 없는 둥 하는 욕은 제가 다 뒤집어쓴 중기의 덕분에 재신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제 존재가 발가벗겨 지는 불상사는 겪지 않아도 되었지만, 촬영장 분위기는 썩 좋은 편이 아니었다. 태수가 중기의 편을 들어주기는 했지만, 모두가 그를 좋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중기는 작은 실수도 용납치 않았다.
“ 거기다.. 몇 일 전에 중기형이 그 놈 찾는다고 촬영장 뒤집은 것까지.. 좀.. 그랬지..?.”
“ 끝내는.. 그 새끼도 못찾았어.. 씨발..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야 잡아서 족치든 하거 아니야!.”
끝내 욕설을 내뱉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중기의 시선이 창 밖으로 향한다. 무엇엔가 쫓기는 듯 이를 앙다문 중기의 시선이 서늘하다. 제게 들렸던 음성은 환청이 아니었다. 한참을 대화하고 얻은 결론은, 똑같은 조건이 되면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것 같다는 막연한 느낌일 뿐이었다.
그 결과로, 아인이 위험해 졌다는 것만 확실해 졌을 뿐, 중기는 손에 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것이 그를 미쳐 버리게 하고 있었다.
딩동-.
“ 나가요!!!.”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선 유천이 테이블 위에 놓인 중기의 지갑을 집어들고 현관문을 향해 달려나간다. 슬쩍 자리에서 일어선 재신이 천천히 중기의 곁으로 다가서 불안한 듯 덜덜 떨려오는 손목을 그러쥔다.
슬쩍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중기의 무미건조한 시선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중기의 머리카락을 슥슥 쓰다듬던 재신은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조용히 주문을 외듯 중얼거렸다. 그 낮은 목소리에 중기는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 박유천!.. 남의 지갑으로 계산을 하는건 어디서 배워먹은 버릇이야?.”
“ 아 형, 형네 집이니까 당.연.히. 형이 내는거지!.”
후다닥 자리를 잡고 앉은 유천이 탁자에 야식 봉투와 중기의 지갑을 내려놓고 후다닥 주방으로 들어선다. 가만히 유천이 하는냥을 구경하던 중기의 몸이 뒤로 돌려진 순간, 중기와 재신 사이로 날아든 벽돌이 유리창을 깨부수고 유천과 민영이 있는 곳까지 날아갔다.
마치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서로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던 넷의 시선이 이리저리 얽힌다.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민영의 손이 간발의 차이로 제 무릎 앞에 떨어진 벽돌에 친친 감겨진 종이 쪽지를 떼어낸다. 가만히 쪽지를 내려다 보던 민영은 탄식을 내지르고 만다. 민영의 손에 들린 종이 쪽지를 빼앗아 든 유천의 시선이 휘갈려 쓴 종이 쪽지를 내려다 본다.
-아인아.. 누구부터.. 죽여버릴까?.
유천의 손에서 팔랑이며 떨어져 내린 종이 조각이 바닥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낸다. 서로를 바라보는 네 사람의 사이로 서늘한 바람이 파고든다.
“ 문재신, 너 잠깐 아인이 집에 가있어라.. 여기 정리 되면 내가 갈 테니까..”
중기의 집안의 분위기와 마찬가지로 서로의 시선을 교환하는 다른 네 사람의 분위기로 중기의 집과 마찬가지로 딱딱하기 그지 없었다. 다른 세 사람의 눈치를 보느라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는 아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온다.
“ 다, 답답해서.. 나.. 요, 요기 앞에.. 좀..”
“ 어디 멀리 가면 안되네?.. 응?.. 요앞, 꼭 요 앞만 가는거야.. 알았지?.. 절대로 멀리 가지 말게?.”
“ 네, 네에..”
벌떡 자리에서 일어선 아인을 올려다 보는 용하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린다.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 방을 나서는 아인의 등을 가만히 바라보던 용하의 입술이 한숨을 내쉰다.
무거운 분위기에서 벗어난 아인의 발걸음이 천천히 옮겨진다. 고개를 들어올려 밤 하늘을 밝히는 달을 올려다 보며 연신 낮은 한숨을 내쉬어대던 아인이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다.
바닥에 등을 대고 드러누워 밤하늘을 가만히 올려다 보는 아인의 눈망울이 울렁인다. 알 수 없는 불안함에 몸을 부르르 떨려오는 손가락을 가만히 가슴 위로 포갠다. 조용히 들썩이는 가슴팍을 바라보는 시선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제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눈물을 흘려대던 아인은 제 바로 옆으로 주저앉는 누군가가 내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벌떡 허리를 일으켜 세운 아인의 뺨으로 서늘한 손가락이 다가온다.
깜짝 놀라 어깨를 굳힌 아인의 뺨을 다정하게 쓸어 내리는 손길에 눈꺼풀을 깜빡이며 상대를 바라보는 시선이 덜덜 떨려온다.
“ 왜, 오지 않았는가.. 걸오.. 내내 기다렸는데 말이지..”
“ … 아.. 저, 그, 그게.. 미, 미안하다.”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해 오는 아인의 뺨을 슬슬 쓰다듬으며 꽤나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이던 사내의 고개가 불쑥 앞으로 숙여져 온다. 자신처럼 상투를 풀어내린 머리카락이 단정히 정돈 되어 바람결에 곱게도 휘날린다. 천천히 제게 다가온 남자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던 아인은 제 뺨을 쥐어잡아오는 손길에 놀랄새도 없이 다가온 입술이 마주 닿아온다.
다급하게 뻗어진 손이 사내의 팔뚝을 잡아보지만, 사내는 쉽사리 떨어지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팔을 내밀어 어깨를 휘감은 사내의 몸이 더욱 바짝 붙여져 온다.
사내의 품을 빠져나가기 위해 몸을 바르작거리는 아인의 입술에서 천천히 제 입술을 떼어낸 사내의 입술이 슬쩍 미소를 지어 보인다.
“ 그래.. 걸오.. 다음 보름엔.. 약조를 꼭 지켜 주게나.. 응…?.”
“ .. 아.. 저.. 저기..”
울먹이는 아인의 뺨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떨어져나간 사내의 입술이 길게 휘어지며 미소를 지어 보인다. 당황한 탓에 후두둑 굵은 눈물이 흘러내리는 아인의 눈가를 쓸어 내리는 손길에 묻어난 가학심을 눈치채지 못한 아인을 향해 꽤다 조신한 미소를 지어보인 사내가 천천히 아인에게서 떨어진다.
“ 다음 보름엔.. 내 여기서 기다리지.. 이번처럼 약조를 어기면 안되네.. 알겠나?..”
“ … …”
턱을 그러쥔 손이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눈을 깜빡이며 사내를 멍하니 바라보던 아인의 입술이 한계를 넘어 벌어진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선 사내의 걸음이 점점 멀어진다. 깜짝 놀라 제 입술을 손으로 가린 아인의 머릿속이 복잡해져 온다.
‘걸오.. 문재신이..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어?????.’
사내가 사라지고도 한참을 가만히 자리에 멍청하게 앉아있던 아인은 다급하게 자리에서 일어서 용하가 있는 중일방을 향해 내달린다. 다리가 풀려 몇 번 다리에 주저 앉은 아인의 얼굴이 붉어진다. 벅벅 제 입술을 문질러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선 아인이 중일방으로 들어설 때까지 끈덕지게 들러붙던 시선은 아인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서야 천천히 제 뒤에 선 사내에게로 시선을 옮긴다.
“ 왜, 그러셨습니까.”
“ .. 확인해 보려고 했지.. 자네가 보기엔.. 저 녀석이 걸오 문재신이라 보는가…”
“ … …”
“ 그래.. 자네도 뭔가 이상타 생각한는게지.. 아무리 나와 약조한 것이 있다고는 하나.. 주먹이 날아왔어야 할 것을..”
입술이 비죽 미소를 지어 보인다. 키득거리며 제 입술을 슬슬 쓰다듬던 사내의 발걸음이 천천히 어두운 곳으로 향한다. 저 멀리에서 망을 보던 다른 사내들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숙인 사내의 입술이 서늘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린다.
“ 이 곳에 내가.. 그리고 걸어 녀석이 왔었다는 것을 쥐새끼 하나라도 알아선 안된다.. 알겠는가.”
“ 예 예에.. 알겠습니다.”
그저 확인해 봤을 뿐이다. 사내의 말에 뒤에 섰던 남자는 어깨를 움츠렸다. 제 방으로 들어서는 사내의 손이 열어젖힌, 다른 이들 보다도 넓고 꽤나 고급스러운 방문 위에 걸린 문패에 쓰여져 있는 ‘장의방’이란 글자가 달빛을 받아 서늘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 강무, 병춘.. 내 다음 보름에.. 네 녀석들에게 도움을 받아야 할 것이 있다.. 도와.. 주겠느냐..”
“ 예, 장의.”
선한 얼굴의 가면 안에 담아두었던 소름끼치도록 악의 가득한 미소가 어두운 밤을 단 번에 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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