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장편

[택정환] 달라 07

음흉마녀 2016. 5. 1. 06:15

" 말해."

 

가만히 멈춰선 정환의 시선이 슬쩍 열어젖혀진 문에 부딪혀 바닥에 떨어진 플라스틱 도시락으로 고정된다. 제 등뒤에 서서 자신의 손에 들려있던 초밥 도시락을 던져버린 택의 서늘한 목소리가 정환의 등으로 꽂힌다. 제게로 뻗어오는 서늘한 알파의 분노의 향이 정환을 찢어발길 듯 날카롭게 파고드는 탓에 정환은 그대로 굳어지고 만다.

천천히 카펫을 즈려밟는 소리가 가까워짐에 따라 어깨가 움츠러든다. 천천히 손을 뻗어 등을 쓰다듬고 위로 올라와 어깨를 그러쥔 택의 입술이 천천히 정환의 귓가로 다가온다.

 

" 말해. 들어줄 테니까. 경기 끝나고 얘기한다는게 뭐야. 얘기해."

" 야, 야.. 최택."

" 말해, 말 하라고. 뒤에서 나 몰래 너희끼리 나를 가지고 놀면서 화나게 하지 말고. 말해!!!!!"

 

거칠게 닫혀 버리는 객실문이 큰 소리를 낸다. 잔뜩 움츠러든 어깨를 잡아 저를 바라보게 만든 택의 서늘한 시선이 정환의 얼굴을 잠시 노려보는가 싶더니 이내 정환은 택의 손에 멱살이 잡혀 침대의 매트리스로 처박히는 신세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빠르게 몸을 돌려 택을 바라보려던 정환은 어깨를 잡혀 침대에 처박히고 만다.

깜짝 놀라 파드득 몸을 떨며 저를 짓누르는 택의 시선에 얼굴을 엉망으로 찡그리고 택을 밀어내기 위해 손을 뻗은 정환의 귓가로 입술을 가져가 분노를 억누르는 목소리를 내는 택의 시선이 새파랗게 질린 정환의 얼굴을 내려다본다.

택의 기분은 최악을 달리고 있었다. 낮의 경합은 제 기분과 마찬가지로 엉망진창이었다. 상대의 수에 질질 끌려다니기 일쑤였고, 이번 년도의 가장 큰 대회임에도 불구하고 집중력을 최악이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택은 몇 일 전, 정환의 집에 갔던 날 정환의 방에서 서로를 부둥켜 안고 무어가 그리 좋다고 웃고 있던 두 사람의 이야기만 듣지 않았어도 택은 이런 끔찍한 기분을 느끼지 않았어도 되었을 것이다.

엉망진창으로 끝나버린 경기, 하지만 그 보다도 더 저를 가슴 아프게 만드는 것은 덕선과 정환이었다.

 

" 말해! 말하란 말이야!"

" 태, 택.. 택아! 하지, 하지마.. 제발 하지마.."

 

질끈 내리감은 눈을 내려다보는 시선이 점점 더 차갑게 식어간다. 난폭하게 턱을 그러쥔 손이 택이 정환의 고개를 억지로 돌려 저를 바라보게 만든다.

두려움에 한참을 뜨여지지 못한 눈이 천천히 들어올려진다. 아무런 대화도 없이 정환의 얼굴을 내려다 보던 택의 손이 느긋하게 단추를 풀어 내린다. 무심하게 행동하는 택과 달리 정환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가고 있었다. 다급하게 택의 손목을 잡아 쥐는 정환의 뺨으로 손이 날아와 날카로운 소음을 만들어낸다.

제 뺨을 그러쥐고 한참을 멍하니 있던 정환은 제 다리에 끼워진 바지가 벗겨져 허공을 가르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미친 듯 소리를 내지르며 반항하기 시작했다.

 

" 야, 최택!! 하, 하지마!! 하지 말라고!! 미쳤어?! 너 갑자기 왜 그러는데!!"

" 그 입 다물어. 그래 시합 끝나고 하려는 얘기가 뭐야. 신경쓰이게 하고 싶지 않다는 그 말이 뭐냐고!"

" 최택!! 정신차려! 너 이번 시합이 얼마나 중요한지 잊어버렸어?! 정신차려!"

" 그러니까 말해! 뒤에서 사람 비참하게 하지 말고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하고 차라리 꺼져 버리라고!"

 

굳게 다물린 입술이 고집스레 아무런 단어도 만들어내지 않는 것에 더욱 분노한 듯 무자비하게 턱을 그러쥐고 있던 손이 들어올려져 정환의 뺨을 타격한다. 깜짝 놀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멍하니 택을 바라보는 정환의 뺨으로 몇 번의 폭력이 날아온다. 눈을 질끈 내리감고 버티는 정환의 행동에 택은 목구멍 가득 찬 고함소리를 내며 정환의 뺨을 내려친다. 살이 마찰하는 소리가 들려온 후, 옆 객실의 손님이 전한 소식에 놀라 달려온 무성과 덕선이 억지로 문을 열어젖히려는 소리가 들려온다. 다급한 덕선의 비명소리에 택의 얼굴이 더욱 엉망진창으로 변한 것을 말할 것도 없었다.

 

" 말해. 다음번엔 기회 없어. 지금 말해. 아니면 그 어떤 말도 들어주지 않을 거니까. 헤어져 주길 바래?"

" 아, 아니야! 그런거.. 아니야.. 택아.. 그저, 그저 신경쓰이는 일 만들고 싶지 않아서 그런거야. 너, 너 이번이 정말 중요한 시기라고.. 나 때문에 너, 너 요즘 엉망이잖아. 그, 그래서 시합 끝나면 얘기 하려고 그랬.. 어."

" 그러니까 더 화나게 하지 말고 말하란 말이야.. 지금은.. 다.. 들어.. 줄게.. 제발."

 

정환의 가슴팍에 떨어진 머리통이 가만히 생각에 잠긴다. 당황한 듯 거칠게 들썩이는 정환의 가슴팍에 기댄 택의 눈가에 눈물이 어린다.

분명 택은 정환을 끌어안고 기뻐하는 덕선을, 조금은 당황한 듯 덕선을 내려다보는 정환을 봤었다. 택은 분명, 두 사람의 행복해하는 얼굴을 보고 말았었다. 시합만 기다려 달라고, 시합이 끝나면 얘기 하겠다고 말하는 정환의 목소리가. 시합이 끝날 때 까지만 기다리겠다는 덕선의 목소리를.. 택은 너무나 선명하게 듣고 말았다. 언제부턴가 제 눈치를 보기 시작한 선우와, 저는 놀리듯 이죽거리는 동룡, 완전히 저를 피해버리는 덕선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정환을 제게서 떼어 놓으려 애쓰던 무성과 미란을 떠올리며 택은 어이없다는 듯 실없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천천히 들어올려진 눈동자에 애정이란 단 한방울도 남아있지 않다. 정환은 새파랗게 질려 택을 밀어내 뻗어진 팔이 매트리스에 처박힌다. 퉁 하는 소리와 함께 튀어 오르는 팔을 무미건조하게 내려다 보며 천천히 고개를 숙여 덜덜 떨리는 입술에 가벼운 입맞춤을 건넨 택의 손이 다정한 입맞춤과 달리 난폭하게 정환의 다리를 벌리고 안으로 파고든다.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대는 택의 손이 엉덩이 아래로 불쑥 손이 들이밀어진다.

 

" 태, 택아 안돼! 안돼! 그러면 안돼!"

" 왜! 말 할 수도 없다! 내 품에 안을 수도 없다! 왜! 내가 더 이상 뭘 더 참아야 하는건데!! 내가.. 내가!! 얼마나 더 속아주고 모르는 척 해줘야 하는거냔 말이야!!!!"

" 택아.. 그런거 아니야.. 아니야.. 시, 시합 끝나면.. 너, 너 기뻐할 얘기 해주려고 그런건데.. 그래서 그런건데.. 왜, 왜 화를 내고 그래."

 

천천히 뻗어진 손이 조심스럽게 택의 뺨을 그러쥔다. 우물우물 목구멍을 간지르는 하고싶은 말은 잠시 목구멍 뒤로 삼킨 정환이 아직도 쿵쾅거리는 소리를 내는 문 쪽으로 시선을 보낸다. 덥썩 제 어깨를 잡아오는 택의 분노한 숨소리 때문에 정환은 더 이상의 고집은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낮은 한숨을 내쉰다. 가만히 택의 눈동자에 시선을 고정하고 잠시 숨을 고른 정환이 불쑥 손을 내밀어 택의 손목을 그러쥔다. 의문을 가득 담은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택의 손을 불쑥 제 아랫배로 가져간다. 깜짝 놀라 뒤로 내빼는 손목을 강하게 그러쥐고 가만히 심호흡을 한 정환의 입술이 열리기 직전 문이 부서지듯 열리며 안으로 뛰어 들어온 무성과 덕선이 깜짝 놀라 침대맡에 선다.

모두가 택을 위한다고 꾹꾹 눌러 담았던 말을 끝내는 지금 이 순간 내뱉어야 한다는 것을 모두 알아차린 듯 했다. 다시 한 번 손에 힘을 주어 아랫배로 끌어당겨온 손목을 그러쥐고 연신 한숨을 내쉬던 정환이 불쑥 단어를 쏟아낸다.

 

" 너, 아빠가 되."

" … 뭐?"

" 너, 어른이 된다고. 8달만 있으면 아빠가 될거야. 알아듣겠어?"

 

멍한 표정으로 정환을 바라보는 택을 향해 어색하게 웃어넘긴 정환이 가만히 택의 이마에 제 이마를 들이대고 조용히 숨을 내쉰다. 많이 놀란 듯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멈춰버린 택의 손목을 그러쥔 손에 힘을 풀고 뒤로 물러서 앉은 정환의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택의 입술이 불만이 잔뜩 섞인 목소리를 낸다.

 

" 그럼 왜 얘기 안했는데. 왜 다 피하고 거짓말 하고 숨겼는데? 내가 왜 마지막이어야 하는건데!"

" 중요한 시합이니까. 너한테는 신경쓰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랬어. 그래서 이번 시합만 끝나면 내가 얘기 한다고 그런거야. 아저씨도 우리 엄마도 너 시합 동안은 집중할 수 있게 하자고 그런거야."

 

다정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정환의 얼굴을 바라보던 택이 툭 뒤로 돌아 한껏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덕선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인다.

당황한 듯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택을 바라보는 덕선을 향해 엄청나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하는 택의 말이 고요한 객실을 울린다. 천천히, 그리고 능글맞게 뻗어진 손이 발가벗겨진 정환의 몸을 시트로 슬쩍 가려 제 품으로 끌어당겨 안는다.

 

" 덕선아.. 미안한데, 나 딱 한 번만 더 저 초밥 좀 사다줄 수 없을까…? 우.리.정.환.이.가. 식사를 제대로 못해서 그런데.. 한 번만 더 사다줄 수 있을까?"

" 아, 어, 어어.. 어, 으응."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지 후다닥 택의 객실에서 나가버린 덕선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고개를 돌린 택의 시선이 정환을 가만히 바라본다. 와락 정환의 품으로 뛰어들어 안기며 정환을 밀어 넘어트린 택이 가만히 정환을 품에 안고 눈을 내리 감는다.

어색하게 웃으며 정환을 바라보던 무성이 슬쩍 자리를 피한다. 침대에 널브러진 두 소년이 가만히 시선을 교환한다. 우물쭈물 뻗어진 손이 정환의 아랫배를 슬쩍 만져본다.

 

" 정말로 그것 때문에 그런거야?"

" 이번년도에 가장 큰 경기라며.. 너 요즘 나랑 같이 있는다고 집중도 못하고 그랬잖아. 아저씨랑 다른 사람들은 빨리 얘기 하라고 했는데.. 나 때문에 자꾸 집중 못하는 너 보니까.. 이번 시합은 넘기고 얘기 하는게 좋을 것 같았어."

" 그럼 덕선이는?"

 

택의 입술이 꺼내놓은 덕선이란 단어에 의문을 표시하느라 고개를 갸웃거리는 정환의 뒷머리로 팔베개를 하고 천천히 몸을 붙여온 택의 입술이 정환의 이마에 와닿는다.

몇 일 동안 저를 괴롭히던 불편한 마음이 단 번에 사라지는 느낌에 미소를 지어 보이며 천천히 정환의 차가워진 아랫배를 만지작거리는 택의 뜨거운 손바닥의 온도에 정환의 얼굴로 벌겋게 달아오른다. 방 안에 저희 둘만 남았다는 것을 눈치챈 택의 손이 시트를 들추고 그 안으로 파고들어 정환을 꽉 옥죈다.

 

" 이번 시합. 남은 두 번 다 이겨줄게."

" 아니면 얄짤없어. 새끼야."

 

팩 돌아선 정환의 목덜미로 떨어진 입술이 뜨겁다. 정환은 이제까지 제가 왜 쓸데없는 고집을 피우고 있던 것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쉰다.

덕선이 눈치있게 문고리에 도시락을 걸어놓고 사라지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택은 정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뭐가 그리 좋다고 입술이 찢어져라 웃고 있는 택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정환의 입술이 낮은 한숨을 내쉰다. 처참하게 경기에서 완패했으면서도 뭐가 그리 좋다고 웃고 있는지 모르겠다며 택의 목덜미에 제 얼굴을 파묻은 정환이 다시 한 번 택을 향해 경고하듯 으르렁거린다.

 

" 너, 그 중국늙은이 못이기면, 나한테도, 우리 엄마한테도 죽을 줄 알아. 미친짓 한 것 까지 다 까발릴 테니까."

" 알았어. 알았어."

 

택의 목소리가 한 없이 다정하게 변한 것에 정환은 질렸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풀썩 택의 품으로 쓰러져 버린다. 정환의 배를 만지작거리던 택은 그제서야 제게 있을 내일 낮의 시합에 대해 집중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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