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장편

[택정환] 달라 08

음흉마녀 2016. 6. 10. 20:10

정환은 눈썹을 잔뜩 찡그리고 책상에 얼굴을 파묻어 버렸다. 교실로 몰려든 구경꾼들과 기자들의 플래시 세례에 가뜩이나 날카로운 신경이 더 예민하게 곤두선다. 선우와 동룡이 정환의 주변에서 사람들을 머 멀리 밀어내 보지만, 기자들의 보도욕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정환을 자꾸만 제게 내밀어지는 녹음기를 피해 자리에서 일어서 후다닥 화장실을 향해 내달렸다. 뒤를 따르는 동룡이 정환의 이름을 애타게 불렀지만, 정환을 지금 이 상황을 피하고만 싶었다.

 

" 김정환씨!"

" 김정환 학생!"

" 대답을 해주세요!"

 

저를 쫓아 내달리는 기자들의 고함소리에 제 귀를 틀어막고 내달리던 정환이 화장실로 숨어들고 나서야 멈춰선 기자들이 아쉬운 한숨을 내쉰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 내리며 연신 한숨을 내쉬는 정환의 뒤로 몰래 달라붙은 남자가 불쑥 정환의 손목을 잡아챈다. 당황한 것도 잠시 정환은 온 얼굴 가득 기분 나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남자를 노려 본다. 히죽 미소를 지어 보이는 남자의 안경 안쪽에 자리한 눈동자가 정환을 품평하듯 위아래로 훑는다. 뭐냐는 제 시선에도 아랑곳 없이 서있던 남자가 불쑥 제 목소리를 낸다.

 

" 김정환씨, 최택씨랑 결혼하신다는데 아직 나이도 어린데 서둘러 결혼하는 이유가 김정환씨 때문이라는데… 정말 입니까?"

" 아, 뭐, 뭐에요! 이거 안 놔요?!"

 

정환을 바라보는, 정확하게는 정환의 배를 바라보는 노골적인 시선에 벌겋게 얼굴이 달아오른다. 팔을 휘두르며 남자를 떼어내려 안간힘을 쓰는 정환을 가만히 바라보던 남자의 손아귀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정환이 비틀거리며 화장실 문에 부딪힌 순간, 동룡이 화장실로 뛰어 들어와 정환과 남자의 사이를 막아선다.

어디서 그런 깡이 나왔을까, 평소의 동룡 이었다면 분명 하지 않았을 정도의 힘으로 남자를 떠밀어내고 단숨에 정환의 손목을 잡아쥔 동룡이 가타부타 말도 없이 화장실을 뛰어 벗어난다.

거친 숨을 내쉬느라 들썩이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동룡의 이름을 불러대는 정환의 목소리에도 아랑곳 없이 후다닥 자리를 벗어난 동룡이 무작정 앞으로 걸음을 옮겨 정환의 곁으로 달라붙는 기자들을 정환에게서 떨어트려 놓고 나서야 정환의 손을 놓은 동룡이 버럭 욕설을 지껄인다. 깜짝 놀라 동룡을 바라보는 정환을 불쑥 올려다 본 동룡이 참담한 표정으로 정환의 손목을 잡고 정환의 아랫배에 이마를 기댄다.

 

" 아 씨발! 야, 기자들이 그거.. 알았는지 애새끼들한테 떠들고 다니는데 어쩌냐? 아후!!! 선생님들이 너 찾고 난리도 아니야. 진짜 어쩌냐."

" 뭐, 그만 둬야지."

" 야! 그렇게 쉽게 말 할게 아니야!~ 택이는 중학교 중퇴고, 너는.. 어후!"

 

답답하다는 듯 저를 바라보는 동룡을 향해 어설픈 미소를 날린 정환이 애써 가라앉는 제 기분을 떨치려 푸스스 동룡의 머리카락을 흐트린다.

언제 쫓아 왔는지 자신들을 향해 다가온 기자들이 정신없이 질문을 쏟아낸다. 잔뜩 얼굴을 굳히고 기자들을 노려보는 정환의 사정이야 어찌 되었건 자신들이 궁금한 것에만 관심이 있는 자들의 질문이 정환을 찢어 발긴다.

 

" 최택 6단이 결혼을 결정하게 된 이유가 김정환 학생의 임신 때문이라는데 맞습니까?"

" 그로 인해 최택 6단이 곤란해 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것이 정말 맞습니까?"

" 김정환씨!"

" 김정환 학생! 대답 좀 해주세요!"

 

저를 다그치는 기사들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정환의 입술이 피식 비웃음을 짓는다. 그 미소가 누구를 향해 있는지는 정환조차도 모르는 듯 했다. 숨소리를 내며 가만히 곧장 달려들 듯 사진기를 들이대고 악다구니를 써대는 기자들을 향해 불쑥 단어가 튀어 나온다. 정환의 목소리에 경악을 금치 못하는 것은 동룡뿐만은 아니었다.

 

" 네, 저 때문이에요, 제가 꼬셨네요. 싫다는 놈한테 몸으로 밀고 넘어졌어요, 부모님이 정해주신 짝이 있었는데 제 마음대로 최택이 나은 것 같아서 제가 꼬셨습니다. 양다리 좀 걸어볼까 했더니 덜컥 애가 생겨서 잘나신 최택 6단 님이 발목을 잡혔네요. 됐습니까? 그렇게 대답해줬으면 싶은겁니까?"

" 아, 저, 저기.. 우리는.. 그게."

" 원하는 대답 해드렸으니까 마음대로 한 번 써보시죠. 마음껏."

 

휙 들을 올려 자신들에게 멀어지는 정환을 더 이상 잡지 못하고 멍하니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는 기자들을 멍하니 바라보던 동룡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버린다. 있는대로 내지르고 돌아선 정환이 향한 곳이 어딘지 뻔하지 않은가.. 아무리 한 동네에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제 아버지가 정환의 상황을 봐줄 것 같지 않았다.

제 이름을 부르며 저를 쫓아 내달리는 동룡보다도 한 발자국 먼저 교무실 안으로 들어선 정환의 시선에 죄인처럼 소파에 앉아 고개를 숙인 미란과 성균이 들어온다. 입술을 타고 흘러나온 한숨 뒤로 어쩔 수 없이 끌려가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정환의 귓가로 연신 한숨이 섞인 목소리를 내는 교장과 교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미란과 성균은 제가 무슨 큰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조아리고 앉아있었다. 이제 곧 겨울 방학이고, 졸업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는 하나, 소문은 분명 주변은 커녕 신문을 통해 최택이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퍼져 나갈 것이 분명했다.

 

" 검정고시가 있으니까."

 

정환은 아무렇지 않은 척 얼굴에 미소를 띄웠다. 정환도 분명 꿈이 있었다. 미란과 성균은 정환의 인생을 송두리째 잃어 버린 것만 같아 절망에 빠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제 부모들과는 다른 무덤덤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정환이 차분하게 내뱉는 목소리에 교무실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다.

선우야 누구나 다 인정하는 수재 였지만, 정환도 선우 못지않은 인재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 정환이 오메가로 발현되자마자 제 짝이라던 선우를 버리고 동네 친구인 유명일을 꼬셔 아이까지 가졌다는 이야기에 놀라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저를 바라보는 담임이자 동룡의 아버지를 애써 무시하며 고개를 푹 숙여 테이블의 유리에 비치는 제 얼굴만 바라보던 정환의 고개가 불쑥 들어올려지는가 싶더니 이내 어설픈 미소가 떠오른다. 제 앞에 놓여지는 종잇장을 바라보는 정환의 눈동자엔 이렇다할 감정이 서리지 않는 듯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정환은 아무런 말 없이 그저 창문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택이 우승을 하고 돌아오는 길의 공항에서 자신들의 모습을 몰래 찍어 추측 기사가 나간 후부터 정환은 이렇게 될 것이라 예감을 하고는 있었다. 그저 이렇게 빨리 오게된 날이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을 뿐, 전환은 아무렇지 않은 척 그저 창 밖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가만히 허공을 바라보는 시선을 쫓아 정환의 얼굴을 바라보던 미란은 풀썩 제 무릎에 얼굴을 파묻어 버렸다. 천연덕스럽게 행동하는 정환의 모습에 금방 울음이라도 터트릴 것처럼 울먹이던 미란은 봉황당 앞에 즐비한 기사들을 익숙하게 재치고 안으로 들어서는 정환이 뒷모습에 털썩 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어 버리고 말았다.

 

" 야, 최택."

" 아.. 정환.. 아."

" 뭐하냐? 밖에 저 난리가 났는데."

 

털썩 택의 건너편에 주저앉은 정환이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택의 손에 들린 기보를 빼앗아 뒤적인다. 가만히 저를 바라보는 시선에도 고집스럽게 고개를 들지 않고 있던 정환은 탁 하고 날카롭게 바둑판 위를 나르는 바둑돌이 완전히 바닥에 쏟아지고 나서야 조용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 박기자님이 전화했었어. 학교.. 그만 둔거야? 너 지금 학교 그만두고 온거냐고."

" 어. 그만 뒀어. 그만 두래."

" 정환… 아."

 

다시 푹 숙여지는 고개 아래로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덜컥 겁이 났는지 밀어 붙이던 평소의 모습과 다르게 허공에 멈춰진 손가락 끝이 파르르 떨려온다. 택은 아무런 말도 끄집어 내지 못하고 그저 멍하니 정환을 바라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눈물이 울먹이는 얼굴로 어쩌지 못하고 불안해 하는 택의 훌쩍이는 소리에도 아랑곳 없이 택의 기보만 들춰대던 정환은 이내 택이 울음에 목이 잠겨 훌쩍거리는 소리를 내고 나서야 고개를 들어올려 택과 시선을 마주한다.

 

" 혹시.. 나는.. 네, 발목을 잡는.."

" 내가, 언제 너한테 싫다고 한 적 있어?"

" 어, 어?"

" 내가 언제 지금 이게 싫다고 한 적 있냐고, 언젠가 걸릴 거 알고 있었어. 라미란여사도 알고 있었을 거야. 하긴 뭐, 생각 하고 있던거랑 직접 당하는 것은 좀 다른 느낌 이었겠지만."

 

울먹이는 시선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더 이상 모르는 척 하고 넘어갈 수 없는지 불쑥 고개를 앞으로 들이밀고 가만히 택의 눈동자를 바라보던 정환이 얌전히 택의 뺨을 그러쥐고 가벼운 입맞춤을 건넨다. 후두둑 떨어지는 눈물을 손가락으로 슥 문질러 닦아낸 정환이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인다. 가만히 이마를 마주대고 작은 한숨을 내쉰 정환이 애써 제 감정을 숨기고 아무렇지 않은 듯 입술을 연다.

 

" 최택, 나는 단 한 번도 불만이라고 한 적 없는 것 같은데. 혼자서 오버 하면서 그런 표정 짓고 있으면 내가 뭐가 되냐? 그만하자. 응? 나는 그런 것들 보다 최택이라는 놈이 더 중요하거든?"

" 정환… 아."

 

와락 제 허리를 강하게 조이고 끌어안는 힘에 택의 품에 파묻힌 정환이 코를 찡긋이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잠시 지었다 풀었다. 천천히 팔을 뻗어 택의 등을 토닥이는 손길에 택의 눈망울에서 눈물이 툭 터진다. 정환의 등을 강하게 끌어안고 펑펑 울어대는 통에 정환의 어깨가 축축하게 젖어온다. 한참동안 아무말도 하지 않고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 꼬락서니를 멍하니 바라보는 방문 밖의 시선에도 아랑곳 없이 서로만 바라보던 시선이 자신들에게로 향할 때쯤엔 각기 제 얼굴에 드리웠던 걱정스러운 표정을 애써 지운다.

 

" 으이구, 사고는 누가 치고 마무리는 누가 하는건지.. 참내."

" 야, 김정환 너 지금 학교에서 짤렸어. 정신차려. 너 이제 고등학교 중퇴야!"

" 짤린거 아니야. 내가 그만 둔거지. 어차피 알고 있던 일인데 뭐 그냥 그 일이 터진 것일 뿐이야. 택이 앞에서 쓸데 없는 소리 하지마."

 

선우의 말에 금새 기가 죽어 고개를 풀썩 꺾어 버리는 택의 얼굴을 흘끗 바라보던 정환이 은근슬쩍 제 바지를 한껏 우그러트려 잡은 손등 위에 제 손을 가져다 대고 잡는다. 그 모습에 덕선이 요란하게 소리를 지르며 놀려댔지만, 오늘 만큼은 덕선의 우렁찬 목소리가 고마운 정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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